영화로 詩를 쓰다, 이창동 감독의 "시"

일상 속 여행 2010. 5. 20. 10:38


이창동 감독의 다섯번째 영화 <시>의 시사회를 보고 온 지는 사실 좀 지났어요.
그러다 오늘 아침 반가운 소식을 듣고, 바로 이렇게 리뷰를 씁니다. ^-^




제6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시>가 바이어들만을 상대로 하는 마켓 스크리닝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고 해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바이어들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답니다.

좌석을 구하지 못한 일부 바이어는 극장 바닥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다고 하네요. 보통 마켓 스크리닝의 경우 상영관의 전 좌석이 매진되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라는데, 너무 반가운 소식이죠.

시사가 끝나자마자  스페인, 대만 등 3개국에 수출되었을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에도 수출 예정에 있다고 해요.
칸 영화제를 두고 '마치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라고 했던 이창동 감독님, 모두가 좋은 결과 기대하고 있답니다! ^-^




자~ 그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화 <시>는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에 이은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랍니다.

전도연에게 칸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밀양>이후 그의 행보를 모두가 궁금해했죠. 매 작품마다 깊은 통찰력과
세심한 시선으로 인간
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창동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는, 배우 윤정희와 함께 '미자'를 통해 또다시 삶과 사랑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할머니라고 부르지는 말자"라고 했듯, 할머니라 지칭하는 것보다 그저 "삶을 조금 더 오래 산 여성"이라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 그녀, '미자'가 여기 있습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작은 소도시의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화 함께 살아가는 그녀는, 늘 고운 옷으로 자신을 가꾸고, 호기심도 많은, 소녀 같은 면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촐하지만 조용한 일상을  살아가던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됩니다. 이번 강좌가 끝날 때까지 모두 시 한 편씩을 써서 제출하라는 강사의 말에, 미자는 생애 처음으로 시를 쓰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시상'을 찾기 위해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소녀처럼 마음이 설레이죠. 그러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찾아오면서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가 죽은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은 무엇이며, 영화가 죽은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영화 속에서 문학 강사로 등장한 김용택 시인의 말을 빌려보면,
詩란,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죠.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다가가는 것입니다. 김용택 시인이 수강생들에게 들어 보이던 사과처럼, 우리는 이생에서 수천번, 수만번, 사과를 보았지만 실제로는 사과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시'의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서 그 존재 자체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대부분, 본다고 생각할 뿐 실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틀어놓은 TV에서 자식을 잃고 서럽게 우는 아프가니스탄 여인이 나와도 슬픔을 느낄 줄 모르고,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그저 무심한 얼굴로 마주앉아 합의금을 운운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돌아보지 않은 이들은 결국 익명의 얼굴로 강물을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가 우리에게 하는 질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詩'를 써보았는가?
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 소녀'의 이름을 묻고, 얼굴을 보려 한 적 있는가?

영화의 더 깊은 울림들은, 여러분이 영화를 보며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시>에서는 '미자'로 분한 배우 윤정희 역시 스크린이 암전된 이후에도 오래도록 마음을 끕니다.
씨네21 인터뷰에서 "30대 여성이 아니라 6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나"라는 질문에 이창동 감독은 "60대 여성이야말로 질문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합니다.

"30대 여성이 시를 쓰는 건 질문이 아니다. 쓰면 되니까. 
그런데 60대 여성이 시를 쓴다고 하면 그건 본인이
질문을 안 해도 옆에서 질문을 하게 되어 있다. “그 나이에
시는 뭐하러 써?” 이렇게 말이다. 시로 뭔가를
새로 시작할 나이가 아니다. 하나하나 잊어가는 시기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해서 질문할 나이라는 거다."
(씨네 21 인터뷰 중)


그 질문이, 사실은 생의 어떤 시기를 정해두고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영화인들과 팬들에게 이창동 감독 최고의 역작으로 불리는 영화 "시".
극장에서 직접 만나보시길, 노민이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