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하바롭스크를 둘러본 후 다시 기차를 타고 이틀하고도 한나절을 쉼 없이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창 밖으로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담아내더니 어느 순간 이르쿠츠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이 고풍스러운 도시는 긴 여정 중인 열차 여행객에게 잠시 쉬어 갈 틈을 주는 곳이야.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유일한 강 앙가라가 도시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어서 더욱 좋아. 도심에는 제정러시아 시절에 지은 오래된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흘러간 과거를 둘러보는 것 같아.
이르쿠츠크는 17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의 군대가 진출하면서 시작된 도시인데,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야. 초기에는 범죄자들의 유형지였지만 극동 지역과 맞닿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아시아와의 무역로를 확보하기 시작했대. 그리고 1898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건설되면서 이르쿠츠크는 동시베리아의 중심 도시로 발전한 거야.

이 시기의 이르쿠츠크는 상업적 발전 못지않게 문화 수준도 유럽의 여느 도시에 뒤지지 않았대. 시베리아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유럽의 문화 예술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최초의 근대 혁명을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이었어.
러시아어로 12월을 뜻하는 ‘데카브리’에서 유래한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 즉위식에서
부패한 러시아 황실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킨 혁명가들을 가리키는 말이야. 그 중심에는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이 있었어.
이들의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혁명 가담자들 가운데 명성 있는 귀족 장교들이 유배된 지역이 바로 이곳 이르쿠츠크였던 거야.

당시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대부분이 남편을 따라 유형을 선택하면서 이곳에 함께 정착하게 됐대. 그리고 이들 덕분에 이르쿠츠크에는 극장과 오페라 공연장, 유럽풍 건축물이 세워졌고, 무도회와 연주회, 시 낭송회 등 당시 유럽 상류사회의 문화와 예술이 전파됐어.
유형이 아니라 아예 도시 하나를 건설한 것 같아.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대신 그들은 이르쿠츠크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어.
영혼까지 맑은 정화하는 바이칼 호수

이르쿠츠크에서 체류 시간이 넉넉하게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바이칼 호수 때문이야.
시내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60킬로미터 가량 달리면 전 세계 담수량의 20%를 차지하는 거대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내. 바로 바이칼 호수. 이 호수는 그 자체로 엄청난 자원이자 각종 동식물의 터전인 ‘생태학적 보물 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얼음이 녹은 봄에는 수심 40미터 아래까지 볼 수 있을 만큼 물이 맑고 깨끗하대.
300개 이상의 강이 흘러 들고 수십여 개의 바위섬이 떠 있는 바이칼 호수는 이게 무슨 호수인가 싶을 정도로 끝이 안 보여서 마치 바다를 보는 것 같아. 가장 큰 바위섬인 알혼 섬은 길이가 72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야.
유람선을 타고 호수 위로 나서면 이 호수가 얼마나 큰지 더 잘 알게 될 거야.
넓이와 물의 깊이가 쉽게 가늠이 안 돼서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조난 당한 느낌이랄까?
티끌 한 점 없이 청명하게 푸른 하늘이 저 멀리서 수면과 하나가 되는 풍경!
아, 생각만해도 환호가 터질 것 같아. 초승달 모양의 호수를 감싸 안은 자작나무와 전나무 숲, 곳곳에 자리한 기암괴석 등 자연이 주는 감동은 그 어떤 예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단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해.

엄숙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바이칼의 풍경은 시베리아의 웅장함을 닮은 거 같아. 종착역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될까.
시베리아 횡단 기차에서의 기나긴 여정은 거친 시베리아 대륙 안에 숨은 말랑말랑한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일이야.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낭만과 천혜의 자연은 앞으로도 수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서 불러들이겠지?

'일상 속 여행 > 아시아 / 오세아니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주 여행 1_서호주(westernaustralia)의 중심도시 퍼스 (0) | 2010.04.15 |
---|---|
[싱가포르 여행] 싱가포르에 부는 예술 바람 (0) | 2010.02.25 |
[러시아 여행 1] 메텔과 철이도 못 타본 시베리아 열차 (2) | 2010.01.29 |
T로밍과 함께 했던 하이난 캠핀스키 리조트 여행 (0) | 2010.01.28 |
T로밍 덕분에 행운까지 얻은 터키 여행 (4) | 2010.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