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파리 여행 6_마레지구(Le Marais)에 뜬 무지개

일상 속 여행/유럽 2009. 11. 2. 13:57

파리에서 가장 좋았던 곳 중에 하나인 마레지구에선 지도 책을 덮어 잠시 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좁은 골목길 마다 독특한 개성이 넘쳐나는 이 곳에선 길을 잃는 편이 나았다. 

마레지구의 골목들은 16세기 중반에는 왕족들에게, 19-20세기엔 유태인들에게,
그리고 1970년대 부터 지금까지는 예술가와 게이들에게 그 주인자리를 내 주었고
그렇게 스쳐간 주인들의 흔적들이 어딘가에 조금씩 남아 지금처럼 멋스러운 동네가 되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예술가들의 거리엔 그들의 풍부한 감수성 때문인지 레인보우 깃발이 곳곳에 휘날리고,
그 곳은 가장 Cool 하고 Trendy 한 곳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이성애자로서 그들의 사랑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쪽이다.
그러나, 조지마이클이나 마크 제이콥스같은 매력남들이 하나 둘씩 커밍아웃을 할 땐, 정말 속상하다!




마레지구의 특정 골목엔 레인보우 깃발 뿐만 아니라 게이들을 위한 서점이나 속옷 가게,
게이전용 바 등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컬러로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골목길을 무지개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고,
그런 열린 마음이 지금의 마레지구를 끌어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마레지구에서 예술가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들을 발견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
그림이나 사진 갤러리는 낯선 여행객들도 반갑게 인사하면 귀찮아 하지 않고 잘 반겨 주니
마음에 드는 곳으로 문 열고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설사 큰 키에 무표정한 강아지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더라도.




쇼핑을 위해 여유돈을 준비해 둔 사람이라면 지갑을 열기 위한 장소로 마레지구가 아주 적절하다.
특이하고 매력적인 샵들이 골목마다 포진해 있어 여유돈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아주 곤란할 지경.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나는 들어가서는 안되는 주방용품 샵에 발을 들여 놨다가
한참을 빠져 나오지 못하기도 했는데,
특히 그 곳에서 유명 쉐프의 쿠킹 클래스가 매일 있다는 얘기를 듣고 - 방문했을 당시에도 진행 중이었고 -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인 다음 날로 예약을 신청했다 오버부킹으로 실패하기도 했다.
(하마터면 파리 이후 일정을 모두 미룰 뻔 했다.) 

미리 알았거나 운이 좋았으면 아마도 파리에서 가장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번 여행 중 가장 아쉽고도 슬펐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걷다가 꽤 유명해진 '경악스럽게 귀여운 뜨개질 부티끄' 도 찾을 수 있었고,
(부티끄라는 표현이 더욱 귀여운)
없는 돈을 털어 얼마전에 태어난 조카 예규를 위해 곰인형 달린 털장갑 하나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뢰밭이 따로 없다.




참 많은 것을 보며 즐거워 했는데, 메모리 카드엔 그닥 담긴게 없는 걸 보니
사진을 찍는 것 보다 눈으로 보는게 더 좋았나 보다.

가끔은 기록하지 않고 머리나 마음 속에만 담아둔 채 자꾸 되뇌일 수록 즐거워 지는 기억들이 있다는게
더 행복할 때가 있다.  마레지구에서의 짧은 시간이 내겐 그럴 것이다.


@ Le Marais,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