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하고 유쾌한 여름날의 추억 "하.하.하"

일상 속 여행 2010. 5. 11. 11:02


홍상수 감독의 열번 째 장편 <하.하.하.>가 개봉했습니다.

지금까지의 홍상수 감독 작품 중 가장 밝고 유쾌하다고 전해지는 이 영화! 정말 재밌게 보고 왔어요.
쉴 새 없이 웃으며, 관객들 모두가 (영화 속) 유쾌한 여름날을 보냈답니다. ^-^ 여러분께도 적극 추천!


영화감독 지망생 문경(김상경은)은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하고 떠나기 전 선배 중식(유준상)을 만나 청계산 자락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합니다. 둘 다 얼마 전 통영에 여행을 다녀온 것을 알게 되고, 막걸리 한잔에 그 곳에서 좋았던 일들을 한 토막씩 얘기하기로 하죠.




문경의 이야기.
통영에 계신 어머니(윤여정) 집에서 묵게 된 문경은 (얼마나 철없이 구는지...ㅋㅋ)

통영을 쏘다니다가 관광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나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해요. 문득문득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건 어쩐지 조금 무서워지기도 하지만.. 어눌하고 철없는 행동탓에 금방 안심해버리죠 ㅎㅎ

성옥의 애인이고 해병대 출신인 정호(김강우)와 부닥침이 있지만, 끝내 성옥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고 같이 이민을 가자고 설득까지 하게 됩니다.


중식의 이야기.
유부남인 중식은 애인 연주(예지원)의 휴가에 맞춰 함께 통영에 여행을 옵니다.
사랑한다는 중식에게 연주는 그럼 왜 자신과 함께 살지 않냐며 비겁자라고 말하고 중식은 온갖 힘들다는 제스추어를 취하며 괴로워합니다. (남들 앞에서 자꾸 유세하듯 우울증 약을 먹는 중식에게 윤여정이 한 마디 하죠. "너 엄청 밝거든!!!")

통영에 내려와 있는 후배 시인 정호와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어울려 다니면서 정호의 또다른 애인인 성옥에게 잠시 곁눈질을 하기도 합니다.



둘은 서로 같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이야기만을 이어갑니다. 정말 친한 두 사람이 같은 시기 같은 소도시에 머무르면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고, 시간이 지난 뒤 그 여름의 추억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죠. 관객 입장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두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교차하며 재미를 줍니다. ^-^ 탁구 경기 하듯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야기 구도의 긴장감이라니!

한편 오직 좋았던 일만 얘기하자는 두 남자의 만담 같은 코멘트는 유쾌하고 담담하게 이어지지만.. 실상 그들의 나레이션을 바탕으로 들어가본 지난 여름의 통영은 '좋았던' 일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 간극도 재미있을 뿐더러, 두 남자가 얘기 나누는 현재의 장면은 흑백 스틸컷으로 처리되어
아련하고 희미한 과거 같고, 두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거의 통영은 선명한 컬러와 분명한 인물들로 오히려 현재보다 더 생생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건 '홍상수의 <오션스 일레븐>'이라 해도 좋을 스타급 배우들의 멋진 연기입니다. 김상경, 유준상, 예지원, 문소리, 윤여정, 김영호, 김강우 등.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래서 이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할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능청맞고, 때로는 너무나 '찌질한' 연기가 실감나게 관객을 찾아옵니다.

홍상수 감독이 그리는 식자파 남자들의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어리광과 진상, 찌질함이라니... 그러나 그 모습들이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기에, "아~~정말!" 하며 웃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의 리얼리티와 디테일을 잘 살려내는 홍상수 감독.

감독님이 매일 촬영날 아침마다 즉석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왜 굳이 그렇게 하냐는 관객의 질문에 했던 대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뭘 하는지 알면서 찍고 싶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아는 척 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내 안의 그 속물성과 치사함과 그럼에도 인간적인 사랑스러움을 알기에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이 끝내 밉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곧, 우리의 모습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