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파리 여행 11_하루 한번의 만찬

일상 속 여행/유럽 2009. 11. 29. 12:56

대게 여행을 하면서 경비를 아껴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땐 먹거리부터 저렴한 곳을 찾게 되는데,
이번 프랑스 여행에선 스스로 다양한 음식을 맛봐야 한다는 유쾌한 의무감을 가졌다. 

혼자 먹는데 dress-up 까지 해 줘야 하는 정말 좋은 레스토랑까지는 무리여서,
'하루에 한번, 캐주얼 레스토랑에서 최대 30유로 정도의 맛있는 만찬을 즐기자'는 법칙을 세우고
점심 혹은 저녁 때 마다 맛집이 있는 골목들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맛집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프랑스에선.
비가 오지 않는다면 모두 도로 한복판까지 쏟아져 나와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지인으로 보이는 프랑스인들이 바글바글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는 곳이면 - 현지인으로 위장한 관광객 무리 조심- 어느정도 맛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고, 그 곳 입구를 나이 든 웨이터가 지키고 있다면
접시를 깨끗히 비우며 행복한 포만감에 젖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레지구를 걷는 날엔 프랑스에 왔으니 달팽이를 먹어야 겠다는 다소 촌스러운 의지가 생겨
사람 북적이는 레스토랑마다 들어가 '달팽이 팔아요?'를 외쳐야 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파리 날리는 집 빼고 열 군데도 넘게 돌아 다녔는데 달팽이 파는 집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프랑스 달팽이 노조원들이 파업이라도 하나! 

그 중 달팽이를 포기하고서 라도 들어가 먹고 싶었던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달팽이를 찾아 마레지구를 세바퀴 쯤 돌고 난 뒤에 결국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중년의 웨이터가 '너, 다시 올 줄 알았어!' 라는 표정으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구석의 1인 석을 안내 해 주었다. 

'Les Philosophes'
철학자들.
이 곳이 끌린데는 이름도 크게 한 몫 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먹구름이 많던 날이 었는데, 사람들은 게의치 않고
먹구름 사이로 간간히 얼굴을 내 비치는 햇살을 쬐며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해서 자리에 조금 익숙해 질 때 쯤이면
옆 테이블 사람이 일행처럼 느껴지게 된다. 내 옆에 앉아 있던 그들이
프랑스어만 쓰지 않았다면 아주 소소한 일상까지 송두리째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닥 살갑지는 않았지만, 동네 친구 대하 듯 날 대하던 청년 웨이터에게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걸로 대신 주문해 달라는 안전하면서도 위험한 부탁을 했고,
다 맛있어서 뭘로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가 내게 가져다 준 것은



튼실한 오리다리 하나였다.
이 요리의 이름은 오리다리 콩피(Confit)로 오리기름에 다리를 장시간 재두고 다시 오븐에 구워 내는 방법으로
요리해서 부드럽고 담백하지만, 약간 달착지근하고 정향의 향이 강해 - 소스때문에 -
많이 먹으면 질리는게 흠이라면 흠.
그래도, 한국서 잘 안 먹는 오리고기를 거의 다 먹었으니 성공한 샘이다.




먹는 도중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웨이터들은 늘 있어 왔던 일상처럼 당황하지 않고 - 손님들도 마찬가지 - 접어 두었던 차양을 내렸고,
잠시 뒤 같은 장소이지만, 아까하고는 또 다른 분위기의 노천카페가 새로 생겨났다.

 
후식은 추천해 주면서 엄지 손가락까지 번쩍 들어 올리는 걸 보니 그 웨이터가 진짜 좋아하는 메뉴인가 보다.
Creme brulee (크렘 브륄레). 타 버린 크림이라는 뜻이라고. 

바닐라향이 나는 커스터드 크림을 오븐에 구운 뒤 위에 설탕을 뿌려 토치로 녹이며 살짝 태우면
크렘 브륄레가 완성되는데, 이 딱딱하게 굳은 표면을 스푼으로 톡톡 깨서 부드러운 속살을 먹는 게 이 후식의 매력.요리사들은 정말 재치 덩어리! 

정말 맛있었는데 지나치게 달아서 내게는 딱 세 스푼 만큼만 후식으로 나오면 좋겠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지만, 돌아와 뒤져보니 여기저기 소개도 된 은근히 유명한 곳이었다.
맛의 철학자들이 운영하는 멋진 곳이라 생각하며 미슐랭 대신 별 네개(별 세개가 최고지만)를 주었다.

 

@ Les Philosophes, Paris.